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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능소화는 팔월의 능소화는 / 윤여송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했다 버드나무 물오른 가지에 보송한 솜털로 싹 티움 시작되는 봄날 어는 언저리에 키 높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모르는 남자와 모르는 여자가 사랑이라는 생경한 언어를 안았다 그리고 시간은 연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어느 날 담장 밖 남자는 해후를 약속한 별리의 시간을 통보하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시간들을 까치발로 담장 밖을 그리던 여자는 기다림에 그리움에 지쳐서 꽃이 되었다지 담장 밖을 그리는 까치발로.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3. 2. 23.
쓸쓸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음은 쓸쓸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음은 / 윤여송 통속으로 가슴을 아리는 유행가 곡조를 빌어오지 않아도 된다 밤새도록 몽당한 연필로 가난한 시인이 울음으로 토해낸 잃어버린 사랑에게 보내는 부질없는 연서를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백일홍 화려하다 붉었던 꽃이 아흔아홉 날에 기어이 스러지고 야막나무 푸르러 청춘이다 여름 한철 기성하던 잎새도 검버섯 낀 얼굴로 메말라지고 재잘재잘 머리꼭지 빙빙 돌게 지독히도 귀찮기던 참새도 떠나가지고 텅 빈 들 가운데 우두커니 홀로 남아 자리를 지키며 말을 놓은 허수아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쓸쓸하지 않다는 항변 같은 독백의 시간이 코스모스 낭창한 허리에 유혹으로 감기울 때 쓸쓸하다고 푸념으로 폐해지지 말라고 별들이 그대를 위해 불꽃에 심지를 돋우고 구름이 그대를 위해 포근한 침상을 .. 2023. 2. 17.
섬 / 윤여송 관념이 퇴적층으로 굳어진 섬에는 푸석불 같은 희망으로 탈출을 꿈꾸는 유배된 언어가 살고 있다 푸른 물비늘을 출렁이며 대양을 활보하던 파도가 고립된 섬에 몸을 부딪쳐 하얀 포말로 생의 찬가를 부를 때면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비틀걸음으로 걷던 언어는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나 희망은 망상이 되어 무수한 시간을 고립 속에 살아온 섬은 언어를 위한 길을 내주지 않는다 닭 모가지만도 못한 울대를 열지 않는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헤 벌린 어두운 동굴 속 핏기없는 미라처럼 거저 냉랭한 숨소리만 바람으로 헉헉거릴 뿐 파도가 격정으로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몰한 희망만 동티를 안은 상처로 남겨져 탈출을 금지당한 언어는 애잔하게 시들어가고 고립된 섬은 점점 더 고립.. 2023. 2. 12.
루비콘강에서 루비콘강에서 / 윤여송 건너지 말아야만 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강 루비콘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그리웁다는 기다림으로 남자는 강 언덕에 서서 여자도 강 언덕에 서서 천년의 시간을 천 번이나 흐르며 만나지 못해 가슴 저민 사랑으로 강안의 연인들이 흘려 내린 눈물을 먹고 시퍼렇게 멍들어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건너지 말아야 한다는 무소의 불문율로 지난 시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혹한 운명 망설이던 남자가 절망으로 파리해진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던 여자도 애절하게 가냘파진 손을 내밀었다 마법은 간절한 사랑의 편이 되어서 마주 내민 손이 길게 다리가 되어서 꼬옥 잡은 두 손을 놓치지 않으리라 남자와 여자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강물은 환희로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고 마침내 새롭게 전설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루비콘강에서 맺어진 사.. 2023. 2. 10.
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터 / 윤여송 사랑의 열병 그 뜨거움 견딜 수 없는 보고 싶음은 너를 향한 내 발걸음으로 나만 그럴까 너도 그랬지 내게로 오는 네 발길도 가슴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 둘 셋 넷 만남을 앞둔 그 시간은 가슴 벅찬 희열의 순간 중력을 이반한 우리의 발길은 오직 사랑 하나뿐 하지만 사랑은 질투가 많아 같이 떠난 그 길은 어긋남으로 나는 오름 길 너는 내림 길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 스치듯 지나는 그 시간 너도 나도 체온은 36도 5부.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3. 2. 8.
우수(雨水)에 젖어 우수 (雨水)에 젖어 / 윤여송 또르르륵 똑 똑 차임벨 소리 있어 누가 오셨나 창문을 열었더니 토독 토독 토도독 말간 진주 알갱이들 초록동이 푸른 잎사귀를 실로폰 삼아 가을 소나티네를 연주하네 부끄러워요 수줍던 작은 잎사귀들 다투듯 고운 얼굴 서로 내밀어 오소서 내 님이라 비 맞이를 하고 구경꾼도 덩달아 음률을 타니 한 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우수(雨水)에 취한 가을은 외로움이 없어서 슬프지도 않아라,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2023.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