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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서재22

편지 편지 / 윤여송 너도 보았으면 좋겠다 오늘 너무 맑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파랗던 하늘을 나는 오늘 편지를 썼단다 부끄러움에 차마 말 못 해 감추고 있던 사랑을 너에게 보내고 싶어 하늘 자리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그려 넣었단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서 바람이 부르는 소리에 숙였던 고개들은 네가 늦지 않게 보내왔네 잔잔한 미소 지으며 기쁨으로 받아 보기를 바라며.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3. 1. 17.
바다 바다 / 윤여송 여자는 바다를 사랑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 바다를 사랑한 여자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별빛이 물비늘에 내려앉는 날 푸른 산호초가 노래하는 바다의 품에 몸을 맡겼지 여자를 사랑한 남자는 바다로 떠난 여자가 그리워 폭풍이 헤진 가슴을 후비는 날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를 마시고 스스로 깊은 바다가 되었지 두 개의 사랑을 삼킨 바다는 부서져라 갯바위에 몸을 부딪치고 남자와 여자가 떠난 자리 쓸쓸한 바람이 웅웅대는 해변에는 메말라 푸석한 이끼만 가득하고 아픈 사랑이 퍼렇게 멍든 바다에서는 두 개의 사랑이 운다.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2023. 1. 5.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 윤여송 애정의 시간은 끝났다고 초라한 택배 상자에 담겨 온 이별 예정되지 않은 통보에 날카롭게 베인 마음은 아픔을 진물로 흘리지만 괴롭다 하면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은 아직 헤집어진 상처를 덮어줄 망각의 씨앗이 자라지 않아서이다.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3. 1. 1.
퇴색한 기억 퇴색한 기억 / 윤여송 오늘 밤에는 반딧불이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을 위해서라고 사랑하기에 이별을 해야 한다고 통속한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서 돌아서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멀어질 때 남아있는 한 사람의 설움을 대신하여 풀벌레들의 격한 울음으로 선율을 타고 무심하게 나풀나풀 춤을 추던 반딧불이가 오늘 밤에는 보이지 않는다. 통속한 사랑의 시절이 잊혀졌기에 그날의 반딧불이는 보이지 않나 보다.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2. 12. 28.
12월의 우체국 12월의 우체국 / 윤여송 12월에 눈이 내리는 날 까치가 울면 기다리던 소식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보내인 소식이 없었으니 보내올 소식도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퇴화된 기억의 줄기를 타고 버거운 발걸음으로 찾아온 우체국에서는 망연히 빈 우체통을 바라보고 선 여윈 등짝을 때리는 매서운 바람만 불고 진달래 꽃잎을 닮은 우체통은 하얀 눈꽃으로 보내온 기다림의 편지를 품에 안지 못해 봄은 아직 멀었었다.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2. 12. 23.
창문으로 바라 본 세상 창문으로 바라 본 세상 / 윤여송 귀뚜라미가 울지 않았던 날이 없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던 날들이 언제였었는지 살진 유방을 탐닉하는 파랑의 손끝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른 담쟁이 넝쿨의 속살거림에 속아 들어 거여한 자유를 상실당하고 가로로 길게 드러누워 신음하는 노쇠한 담장 아래에서는 하양 시계풀꽃이 피었다 스러지고 빨간 봉숭아꽃이 피었다 스러지고 노오란 국화꽃이 피었다 스러지고 좀 벌레에 갉아 먹히우며 시간의 줄기가 비명을 지르던 그 시절에는 우편배달부의 핑경 소리가 가져오던 그리움의 끝을 매듭지어 줄 귀뚜라미가 울지 않았었다. - 시집 '수염 난 여자를 만나다' 중에서 - 2022. 12. 16.